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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

예불문--오분향례 4

5,072 2017.10.21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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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至心歸命禮 三界導師 四生慈父 是我本師 釋迦牟尼佛)

    

    <옮김>

     삼계의 도사이시며, 사생의 자부이시며, 우리의 근본 스승이신 석 가모니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오로 이 목숨 바쳐 귀의하며 예배드리 옵니다.

    

    <풀이>

     삼계의 모든 중생들을 인도하여 가르치시는 스승이시며, 온갖 생 명들의 자비하신 부모이시며, 우리들의 참다운 근본 스승이신 석가 모니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다해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해설>

     여기서부터는 예배의 구체적 대상인 삼보에 대해 표현하고 있습니 다. 삼보는 불보.법보.승보(佛寶.法寶.僧寶)의 세 가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첫째, 불보는 부처님을 이르는 말로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또 다 른 이를 깨닫게 하는 자각.각타(自覺.覺他)의 행이 원만한 분입니 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귀중한 보배인 것입니다.

     둘째, 법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교법은 세상 의 어느 것보다 소중하기 때문에 보배인 것입니다.

     셋째, 승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대중을 말합니다. 승보 는 귀중하고 존경할 만한 것이므로 보배에 비유한 것입니다.

     맨 앞의 "지심귀명례"는 일곱 번 나온다고 해서 흔히 칠정례(七頂 禮)라고 말합니다. 칠정례의 첫번째, 두번째는 부처님에 대한 예배 이며, 세번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예배이고, 네번째부터 일 곱번째까지는 부처님의 단체에 대한 예배입니다.

     이 칠정례는 예배의 기본입니다. 흔히 법당에서 절을 할 때는 줄 여서 삼배만 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삼배를 축소해서 일배만  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법당에서 절을 할 때는 삼배 를 올리고, 보통 친견하는 일반 스님네께는 일배를 올리는 것이 자 연스러운 일입니다.

     만약 여법하게 법상을 차려 놓고 큰스님께 절을 올릴 때는 삼배를 하지만 무조건 삼배를 고집하는 것도 부담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을 할 때도 지혜롭게 적절한 방법을 택해서 해야 할 필 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거듭 일곱 번씩이나 되풀이해서 나오는 "지심귀명례"는 그 뜻이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바쳐 귀의하고 예배한다'는 말입니 다.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서 하나 뿐인 목숨을 바친다는 말은 곧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하 는 그 순간은 모든 것이 오롯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목숨을 바칠 만큼 온 우주가 나의 절과  함께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할 때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백팔배나 삼천배를 운동처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굴신운동이라고 해서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리 숫자 를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춰 절하는 것도 중생의 병통을 고치는 하나 의 좋은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면 자칫 예 배의 근본 정신에서 어긋나는 수가 많습니다. 단 한번을 하더라도  온 우주가 녹아 내리는 둣 정성을 담아서 예배하는 것이 진짜 예배 인 것입니다. 말 그대오 "지심귀명례"로 하는 것이 예배의 기본 자 세입니다.

     첫번째 "지심귀명례"는 부처님께 하는 것인데, 부처님은 삼계의  도사이시고 사생의 자부이시며, 나의 근본되는 스승이기 때문에 예 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부처님에 대한 근본 인 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부처님께서는 "삼계도사"이십니다. 삼계는 욕계.색계.무색계 (欲界.色界.無色界)의 차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계 를 오늘날의 현실적인 차원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즉, 욕계는 탐욕에 찌들어 돈벌이에만 눈이 어두운 사람을 가리키 는 말로, 색계는 명예에 찌들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무색 계는 마음이 청정해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각각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삼계를 하늘로 따져서 욕계.색계.무색계로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늘의 세계도 그렇게 여러 가지로 펼쳐져 있 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삼천 년 전에 이 우주가 무한하다 는 것을 경전 곳곳에 설해 놓으셨습니다.

     요즈음에 와서 과학이 천체 망원경으로 태양계를 발견하고 은하계 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미 훨씬 이전에 깨달음의  안목으로 무한한 우주 세계를 증명해 놓으셨습니다. 부처님의 위대 성은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입증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삼계는 곧 어떤 부류의 중생이든 혹은 무엇을 하며 사는  사람이든 천차만별의 인생들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입니다. 부처님 께서는 삼계의 도사이시니 그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간에 모든 사 람들을 이끌고 안내하고 제도하는 스승님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부처님께서는 "사생자부"이십니다. 사생은 태.란.습.화( 胎.卵.濕.化)의 네 가지 형태로 태어나는 중생의 세계를 말합니다.

    태생은 인간이나 짐승 등 모체의 태에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난생은 새 종류 등 알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습생은 물기가 있는 습한 곳에서 생겨나는 벌레 등을 말합니다. 화생은 의지하는  곳이 없이 변화하면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극락세계에서는 태 생하는 것이 아니라 화생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중생세계에는 해 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사생 중에서 제일 큰 중생이 태로 태어나는 중생입니다. 중생세계 에는 태.란.습.화의 순서로 작아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생의 자부 이시니 인간은 물론이고 하찮은 미물에게까지도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종교에는 그런 자비사상이 없습니다. 불교의 자 비사상은 아주 철두철미하게 완벽합니다. 부처님의 자비는 그 어디 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막 태어난 갓난 아이에게 자비를 베풀듯이 모든 생 명있는 것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생은 어떤 양상으로 태어나든 간에 모든 생명있는 것들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 입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는 "시아본사"이십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 한 부분입니다. "시아본사"를 글자대로 해석하면 '나의 근본되는  스승'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근본 스승이란 말은 대단히 중요한 의 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스승을 만납니다. 스승이란 나에 게 가르침을 준 모든 사 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불교를 믿는 신도 중에는 어떤 사람은 관세음보살을 스승으로 삼아 열심히 관세음보 살만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약사여래만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와 같이 각자 자기가 믿고 따르는 스승이 다르고 많지만, 그 모든 스승을 추적해서 근본을 찾아가면 석가모 니 부처님이란 것입니다.

     에를 들어 우리가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혹은 그 밖의 스님들 께로부터 배운다고 해도 그 가르침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구 그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에게서 나온 것이란 말입니다. 자기 자신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교조는 석가모니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서 불자라면 누구나 근본되는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와  내력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근본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 처님을 위시해서 배움의 눈만 뜨고 있다면 스승은 도처에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가게 되었습니다. 염라 대왕이 그 에게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기에 지옥에 끌려와서 심판 을 받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하기를, "아무도 나를 가르쳐  주는 선지식과 지도자가 없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해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염라대왕은 그에게 "살아 있을 동안에 건강하던 사 람이 병들어 고생하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 니 그는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보았고, 자기도 그런 경험을 했노라 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이 세상에 그것보다 더 훌륭 한 선지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하고 꾸짖었습니다.

     계속해서 염라대왕은 그에게 "주위에서 이 세상을 하직한 사람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또 그런 일도 여러 번 보았노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또 "이 세상에서 죽음처럼  훌륭한 스승을 보고도 배우지 못했단 말인가"하고 꾸짖었습니다.

     세상에서 노병사의 실상들은 그대로 훌륭한 스승이면 살아있는 선 지식입니다. 우리가 경전을 통해서 가르침을 배우고 또 스승을 통 해서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은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것일 수가 많 습니다. 그것보다 살아가면서 겪는 삶의 현상들에서 보다 깊고 의 미있는 가르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세상 구경을 통해서 출가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네 개의 문을 통해서 인간의 생로병사의 실상을 보고 출가를 결심한 것입니다.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염라대왕의 질책도 바로 현실 속에서 귀감 이 되고 스승이 될만한 것에 눈 뜨는 것이 중요함을 말해주고 있습 니다. 그런 가르침을 통해 자각하고 발심하게 되면 그것보다 더 훌 륭한 스승은 없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가 불교의 최종 목표라고 했을 때 누구 의 설명을 들어서 깨닫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스스로  경험하고 발심하는 것이 공부의 가장 빠른 지름길이며, 결실 또한  큽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보면 도처에 선지식과 스승이 가득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경험하는 것 하나하나가 바로 자기를  인도하고 깨우치는 스승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발심과 그로 인해서 진리에 대한 눈뜸을 배워야 합니다. 설사 부처님께서  이 자리에 와서 가르친다고 해도 진정한 마음의 눈뜸은 스스로의  자각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정진을 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 속에 있는 마음의 눈을 뜨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자는 것입니다.

     불교는 모든 문제의 근본을 자기 자신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보는  종교입니다. 자신의 문제가 해결됨으로 해서 우주 삼라만상의 일들 이 그 열쇠로써 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부 르며 기도 정진하는 것도 결국 자신 속에 무한히 응축된 힘을 끌어 내는 작업인 것입니다.

     불교는 대상에 집착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상을 통해 궁 극적으로는 자신의 무한한 힘을 끌어내야 합니다. 대상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대상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올바른 불교관이 아닐 뿐더러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더 욱 아닙니다.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도 궁극적으 로는 자기 자신 속에 내재된 불성에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중생이지만 미래에는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 리도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에배의 대상은 석가모니불이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은 말할 것도 없고 유정.무정(有情.無情)의  모든 것이 그 속에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절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가정으로 돌아갔을 때 가정 을 법당으로 삼아 모든 가족들을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예배드리는  하나의 훈련입니다. 가정에 있는 내 가족 부처님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시방삼세", 즉 어느 곳 어느 때라도 항상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공위성을 타고 아무리 멀리 도망간다고 해도 시방 속을 벗어나 지는 못합니다. 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소급해 간다고 해도 역 시 삼세를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께  에배드리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절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아만을 깨고 덕을 키워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배드 릴 때는 항상 그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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