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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

예불문--오분향례 1

5,958 2017.10.0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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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戒香 定香 慧香 解脫香 解脫知見香

    

    <옮김>

     지계의 향이여, 선정의 향이여, 지혜의 향이여, 해탈의 향이여,  해탈지견의 향이여. 이 거룩한 향을 사루어 올립니다.

    

    <해설>

     위의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 해탈지견향"의 다섯 가지 를 오분법신향, 또는 줄여서 오분향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오분 향은 부처님을 위시해서 모든 깨달은 분들이 갖추고 있는 광대한  무량공덕을 가리킵니다.

     공덕을 크게 말해서 만행(萬行), 만덕(萬德)이라고 합니다. 흔히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 가지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것을 줄이고 줄여서 다섯 가지로 말할 때 오분향이라고 하는 것입 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분향 속에는 온갖 수행의 결과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오분향의 끝에 "향"자를 붙인 것은, 옛날에는 세속에서 가장 값진 물건으로 향을 첫째로 꼽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향 의 고귀함을 마음에 심는다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분향이라고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멋진 말입니다.

     "계"가 잘 실천되면 향기롭고, "정"이 잘 이루어지면 또한 향기롭 고, "혜"가 얻어지면 그 향기는 오래도록 남는 것입니다.

     처음에 나오는 "계향" "정향" "혜향"의 세 가지는 三學이라고 히 여 불교의 기본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삼학은 불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삼학이란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은 신행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보살의 수행 덕목인 육바라밀도 삼학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삼학의 첫째인 "계"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경계한다'는 뜻인데 흔히 계율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계"는 진정한 의미를 깨 닫기 위해서는 글자 모양을 잘 분석해 보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라는 글자는 '울타리(井)'에 '창(戈)'을 들고 서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계"는 집 밖에서 창을 들고 서있으면 서 집안을 지키는 수위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위의 역할이란 집안으로 들여보내야 할 사람은 들여보내고, 들 여보내지 말아야 할 사람은 들여보내지 않는 일을 책임지는 것입니 다. 또 수위는 사람을 함부로 들여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낯선 사람 이면 무조건 안들여보내는 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수위의 임무를 충분히 완수할려면 취사선택의 분별을 잘 할 수 있 는 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수위의 역할에 미루어 볼 때 "계 "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분별하여 궁극적으로는 해야 할 일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오늘날 "계"의 의미는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규칙이나 질서, 사 회의 규범, 도덕성 등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현실에 맞지 않 는 계율 자체에 너무 매달리고 집착하여 좁은 안목이 되는 것은 계율의 근본정신에서 어긋난다고 할 수 잇습니다. 또 계율은 개인이 나 단체의 역할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즉, 승려집단에서 필 요로 하는 계율과 신도단체에서 필요로 하는 계율은 각각 다른 것 입니다.

     계율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지 말라는 금지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그 속에는 우리에게 이익되는 점도 들어 있습니다. 그렇 기 때문에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일 줄도 아는 융통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계율을 잘 지키고, 잘 범하고, 잘 열고, 잘  막을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각 개인이 지켜야 할 도덕이나 규칙, 질서가 한데 모여 사회가 필 요로 하는 도덕과 규칙, 질서가 됩니다. 우리가 질서나 규칙을 잘  지키면서 매사를 모범되게 행동하는 것은, 마치 물이 흐르듯 향기 가 저절로 풍겨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향"이라고 하는 것은 계율을 잘 지키면 혼탁하고 무질 서한 사회가 밝고 명랑하고 깨끗한 사회가 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절로 향기가 풍겨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단체에 나아가든지 눈에 거슬리지 않고 물이 흐 르듯 조용히 규범을 잘 지켜나가는 사람에게는 향기가 저절로 풍겨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에다 "향"자를 붙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의 "정향"은, "계향"이 잘 이루어지면 저절로 오는 것입니 다. 여기서 "정"은 '안정'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첫번 째의 "계"향이 각자 자기의 위치을 잘 지키는 것이라면 "정향"은  모든 것이 멈춰진 고요한 안정의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개인의  안정은 물론 집안의 안정과 나아가 사회의 안정까지를 통틀어서 "정향"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회가 불안정한 것은 모두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 입니다. 고용주는 고용주의 욕심만 부리고, 종사자는 종사자의 욕 심만 부릴 때 그 결과는 마찰과 충돌이 일어나며, 그것은 불안정한 상태가 됩니다.

     "정향"이란 남편은 남편의 할 일을 충분히 행하고, 아내는 아내로 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마찬가지로 각자가 자기의 위치를 충 분히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안정이 오며 거기에는  향내가 안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흔히 사찰에서는 스님들이 신발을 벗어 놓는 곳에 [조고각하(照顧 脚下)]라는 구절이 씌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너의 발 밑을 잘 살펴보라'는 뜻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아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가 처해 있 는 그 자리에서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잘 실행하라는 뜻입니다.

일본의 어느 종파에서는 [조고각하]라는 말을 보물처럼 여기며 신앙하고 있습니다. 그 절에서 판매하는 모든 물건마다 그 말을 풀어 서 '한 모퉁이를 비추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나라의 보 배'라고 써서 그 말이 의식 속에 배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그 부분에 충실한 사람은 바로 나라의 보배라는 것입니 다. 일본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그 말뜻을 이해하며 실천하려고 노 력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처해 있는 한 모퉁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부분만 잘 비추면 그 사람은 보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잘 할 거라고 해서 남의 자리까지 참견하는 것은 욕심에 불과합니다. 자 기 임무에 충실하고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 데서 모든 안정은 찾아 지는 것입니다.

     "정향"이란 말의 뜻은 바로 [조고각하]라는 한 마디로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처한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잘 지키 는 사람은 결국 안정을 얻을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서 저절로 향기 가 뿜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세번째의 "혜향"은 '지혜의 향기'를 뜻합니다. 불교에서는 지혜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혜로운 인생, 지혜로운 사 람 등 지혜를 강조합니다. 그 어떤 것이라고 지혜가 없다면 빛을  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유한 삶을 살기보다는 지혜롭 게 하는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지혜가 없으면 잘못 쓰여질 수가 있 습니다. 그러나 비록 조촐한 삶이라 하더라도 지혜가 있다면 그 삶 은 밝게 빛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는 우리의 삶을 향기롭게 하 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자비보다 지혜를 강조합니다. 자비와 지혜라는 표현  대신에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하여 항상 지혜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바탕이 되어야 올바른 자비가 이루어질 수 있습 니다. 그래서 지혜는 "계"와 "정"이 마련되면 저절로 얻어지는 삼 학 중의 맨 마지막에 놓이는 덕목인 것입니다.

     삼학의 가르침을 흙탕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돌을 던져 흐리게 된 흙탕물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  물은 마실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살이입니다. 그 런 흙탕물을 맑게 하려면 우선 물이 움직이지 않고 고요해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돌도 던지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아야 물이 움직 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금지하는 일이 바로 "계"에 해당합니다.

     그 다음에는 흙이 가라앉도록 조용히 기다리면 안정이 찾아오는데 그것이 바로 "정"의 상태입니다. 수면이 안정되어 고요해지면 그  물 위에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모두 비춰볼 수 있고, 맑아진 물은  마실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을 "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무질서하고 혼탁해져서 엉망진창이 된 삶이 있다면 우선 질서를 바로잡아 안정을 되찾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안정을 되찾는 일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안정 위에 우리가 기대하는 발전된 삶을 꿈꿀 수 있는 것입니다.

     계.정.혜 삼학의 실천은 개인의 인생살이나 가정생활에서는 물론  이웃과 사회에까지 그 어디에도 해당이 안되는 곳이 없습니다. 그 래서 불교를 한 마디로 삼학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삼학은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짧은 편지를 한 장 쓰려고 해도 삼학의 순서대 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조금 전까지 누구와 다투고 신경이 날카로 와져 았다면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지난 일 을 자꾸 생각하면 마음은 끝까지 움직이게 됩니다.

     생각을 멈추는 일이 "계"이며, 그래서 안정이 되면 "정"을 얻고,  그 다음에 "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든  계.정.혜 삼학의 순서로 이어져야 합니다.

     삼학의 이런 뜻을 음미하면서 예불을 드려야 합니다. 결국 삼학은 모든 개인적인 수행이나 가정과 사회에서 안일어났으면 좋은 일들 을 모두 멈추어 달라는 뜻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 게 함으로써 개인을 위시해서 가정과 사회가 안정되고, 나아가서  지혜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불문>의 한  대목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참으로 엄청난 것입니다.

     삼학을 삼층집에다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어리석은 임 금이 살았습니다. 그는 어느 곳을 지나가다가 근사한 삼층집을 보 았습니다. 그래서 목수에게 가서 삼층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했습니 다. 그런데 한참 후에 가보니 겨우 일층만 지어 놓았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임금은 일층은 필요가 없고 다만 삼층만 지어달라고 우겼 다는 우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삼학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기고 있 습니다. 세상에서 삼층만 짓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층 이 있어야만 이층이 존재할 수 있고, 이층을 지어야만 비로소 삼층 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발전과 마음의 지혜를 얻는 일이나 가정의 발전, 나아가 국가의 발전도 그와 똑 같은 이치입니다. 제대로 밑거름도 닦아 놓 지 않고 엉뚱하게 다른 결실을 바란다면 삼층만 갖겠다는 어리석은 임금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계.정.혜 삼학은 어느 곳 에 어떤 일을 하든지 우리가 되새겨야 할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네번째의 "해탈향"에서 "해탈"은 모든 장애, 고통, 어려움, 문제 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생로병사를 위시해서 집착 때문 에 일어나는 개인적인 모든 문제를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런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처럼 훌륭한 인격자가 되려면 현재의 상태에서 부단 히 벗어나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는 조금이라도 더 겸손해져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양보하는 마 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것을 삶 속에서 해탈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생사해탈이 목적이라 하더 라도 작은 해탈부터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 신을 어떤 고정된 관념 속에서 보지 말고 항상 새로운 각도로 바라 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늘 새로운 삶을 꿈꾸며, 창조적인 태도로 매 순간을 사는 것이 해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런 삶에 는 향기가 안날래야 안 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해탈을 실천하는 한 방법으로 옷입는 것 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같은 옷이라도 조금만 신경을 쓴다 면 새롭게 변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외형적인 모습에만 신 경을 기울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 면 외형적인 몸치장 또한 마음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대부분 수행력이 깊은 사람일수록 마음이 그 사람을 지배하지만  수양이 앝은 사람일수록 몸이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 사실 도 모른 채 그저 마음만 중요하고 몸은 별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입니다. 절에 갈 때는 가능하면 가장 단정하 고 깨끗한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단정한 몸차림이면 마음은 저절 로 상쾌해지게 마련입니다.

     관세음보살의 몸치장을 보면 온갖 장신구로 장엄한 것을 볼 수 있 습니다. 또 절의 단청이나 탱화의 색깔도 대단히 화려합니다. 그것 은 결국 우리의 인격을 형상화해 놓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관세음보살처럼 우리의 인격도 훌륭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격이란 몸과 마음을 합하여 지칭하는 것이지 단지 마음만을 뜻 하지는 않습니다. 몸은 아무렇게나 하고 있으면서 마음이 훌륭해지 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몸이 잘 다듬어지면 마음 또 한 정된되는 게 중생의 근본 모습입니다.

     하찮은 옷 하나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한 가지 예로 스님들이 승복을 입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승복을 입고 있으면서 아 무렇게나 행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외모 또한 마음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해탈이란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좀 더 미래지향적이고 발전 적이며, 새로운 삶을 꿈꾸고, 창조하고, 구상하며, 그것을 몸소 실 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매일 대하는 식구들도 새로운 각도에서 신 선한 시각으로 본다면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늘 새로운  모습으로 현재의 상태에서 변화 발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일상생 활 속에서의 해탈입니다.

     어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공부의 진척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법회에 참석하여 뭔가 배우려는 마음을 갖는 것 이 바로 작은 해탈의 시작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계속된다면 언젠 가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정에서부터 주부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한 것 입니다. 주부의 마음가짐이나 생활태도가 밝고 행복한 쪽으로 바뀌 면 그 가정은 틀림없이 밝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부는 항상 행복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쉽게 실천할 수 있습 니다. 또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가 전부 자신의 인생입니 다. 그 사이를 단 일초라도 빼 버린다면 자기 자신의 전인생은 무 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전부 자기의 인생이라면 매 순간을 의욕적이고 신선한 생각으로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노력 해야 합니다. 늘 향상하려고 노력하는 그 마음가짐이 바로 해탈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을 긍정적이고 새롭고 밝고 맑 은 마음으로 성장시키려는 것이 진정한 해탈인 것입니다.

     인간의 일생은 한 번 밖에 없는 예술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평생 을 통해 자신의 예술품을 다듬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을 보다 아름답게 자신의 작품을 장식할 수  있도록 해탈의 의미를 되새기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분향의 마지막으로 "해탈지견향"은 해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 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지견"은 '지혜'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아울러 "해탈지견"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해탈의 경지로 이끄는 중 생제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불교는 자신의 해탈과 함께 다른 사람의 해탈을 동일시하기 때문 에 전법을 통한 중생제도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탈에 대한 바른 이해, 즉 "해탈지견향"이란 나와 더불 어 모든 사람들의 해탈을 함께 성취하려는 교화활동을 뜻합니다.

     해탈에 대한 바른 견해가 섰다면 자기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겠다 고 생각하고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이해가 되 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제대로 알게 되면 자연적으로 실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둘이 아닌 상 태가 되어야 합니다. 앞의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의 각각  항목이 참으로 자기 것이 되어서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 "해탈지견 향"입니다.

     이상으로 오분향의 설명을 다시 정리하면 "계향" "정향" "혜향" " 해탈향" "해탈지견향"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중요한 뜻을 지 니며, 그것이 또한 순서대로 실천될 때 완전한 것이 됩니다.

     오분향에는 부처님의 모든 법문이 함축되어 있으며, 부처님과 모 든 수행자들이 갖춘 무량한 공덕이므로 우리도 그것을 본받아야 합 니다.

     오분향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배 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들께서는 평생을 통해서 < 예불문>의 구절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실제 로 오분향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오분향은 읽고 또 읽어 도 향기가 가시지 않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중요한 가르침인 것 입니다.

     오분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압권해 놓았다고할 수 있습니다. 계.

    정.혜 삼학을 통해 해탈하게 하며, 그 해탈을 남에게 전함으로서  해탈지견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삼학이라 할 때의 學은 단순한 글공부가 아닙니다. "계" 를 지키고, "정"을 찾고, "혜"를 얻는 것 모두가 학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참선하는 사람을 공부인이라고하는 것입니다. 자 기 자신이 불자라고 생각한다면 항상 공부인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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