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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

참으로 고즈녘한 칠장사풍경

4,919 2016.04.2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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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고즈녘한 칠장사풍경

안성은 그야말로 불교문화의 보고라는 생각이 든다. 태평미륵에서 빠져나와 조금만 가다보면 길 우측으로 탑이 하나 보인다. 보물435호로 지정된 죽산리5층석탑인데 고려시기양식이다. 같은 고려시기 탑인데도 전혀 백제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백제오층탑과 같은 형식으로 만들었다는 느낌은 드나 다분히 고구려 북방양식이 던져주는 감각을 던져주고 있어 역시 고구려전통이 전해지는 곳임을 실감할 수 있다. 백제전통과 고구려전통이 결합된 것이라는 게 솔직한 나의 느낌이다.

오층탑 옆에는 석조여래입상이 1기 서있는데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인다. 없어진 봉업사지(奉業寺址) 것이라 하는데 다행히 칠장사와 죽산리에 석상이 남아있어 사찰규모를 짐작케해준다. 풍만한 두상에 균형잡힌 불신,삼도가 분명하고 옷자락이 선명하여 전승상태도 양호하다. 마을에서도 이것도 미륵이라고 부르고 있다. 봉업사가 폐사되면서 마을에 방치된 채로 민간에서 모셔지다가 겨우 오늘날의 자리를 찾은 것이다.

일죽면 조사를 끝내니 비가 온 탓인지 일찍 저물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인근 칠장사로 향하였다. 광혜원 가는 길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칠현산 (七賢山) 기슭에 자리잡은,작지만 오래된 고찰 칠장사 입구도 여느 절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덜 알려진 탓으로 관광객이 많지야 않지만 운치좋은 계곡에 자리잡은 음식점들이 음식찌꺼기를 냇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혜소국사(慧炤國師)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철당간지주가 음식점들을 굽어보며 서있었다.

공기좋고 물좋은 산사 밑에서 잠을 청하자던 나그네의 소박한 꿈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새벽 4시까지 고음의 확성기를 달아놓고 남녀가 불러대는 노래와 몸부림에 가까운 춤판으로 산사의 아랫동네는 심야 캬바레로 변해 있었다. 밤을 지새우는 몸부림을 민중적 고행의 통과의례로 보아야 할 것인지. 어쨌든 미륵님 목소리보다는 중생의 몸부림이 더 가깝게 다가오는 잠 못 이루는 여름밤을 실감하였다.

그러나 한여름철에 찾아간 내가 전적으로 잘못이었다. 이듬해 초겨울에 다시 찾아가본 칠장사는 찾아오는 사람도 드믈고 고즈녘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걸미마을에서 칠현산으로 들어가는 십리길이 만만치않은데다가 스산한 초겨울풍경이 산사를 찾아가는 감정을 묘하게 흔들어놓았다. 같은 절인데도 이처럼 느낌이 다른 것이다. 다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의 칠장사는 작은절에 불과하다. 그러나 당간지주가 앞쪽으로 나와있고 부도밭이 한참을 걸어나와서야 있는 것으로 보면 당대에는 상당히 컸던 절임을 알 수 있다. 절은 작지만 손타지 않은 풍경이 오히려 정감이 간다. 대웅전 앞마당에 칠장사대중창이란 거대 간판이 서있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이 절도 완전히 '새마을운동식불사'가 이루어질 판이다. 군대에서 불도저로 연병장을 만들고 대단위 공사를 하듯 사찰건축물과 화장실,주차장 따위를 아주 '과학적'으로, '기계적'으로 두부자르듯 불사를 하게될 우려가 예견된다. 불사를 좀더 자연스럽게 할 수는 없을까. 산과 들을 십중 활용하고 자연스럽게 자라고 있는 나무와 풀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옜 건물터에 아담하고도 맛갈스런 건물을 올린다면 그 누가 불사를 나무랄 것인가.

이왕 이야기가 나온김에 한마다 더해본다. 대웅전 옆에 봉업사지에서 가져다놓은 석불입상을 세워놓았다. 통일신라시기 조성된 불상으로 보이는데 봉업사지가 일찍이 폐사되면서 죽산중학교 교정에서 갖은 천대를 다 받다가 칠장사로 옮겨졌단다. 광배와 불신이 하나의 통돌로 되있는데 옷자락이며 수인,표정 등이 섬세하기 이를데 없는 상당히 우수한 예술품 그대로다.

봉업사지불상을 찾다가 처음에는 요즈음에 만든 것인줄 알았다. 기단부를 새돌로 만들었는데 전혀 격에 맞질 않는다. 누군가 화학약재를 써서 불상에 끼어있는 이끼 따위의 묵은 때도 말끔히 벗겨냈다. 마치 겨울추위에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아기같다. 천년 세월을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돌에 붙은 이끼는 그 자체가 돌을 보호해주는 피막이 됨을 알고나 한 짓일까. '새것'콤플렉스라고나 해둘까. 몇해 뒤에 다시 찾아갔을 때, 여전히 희망을 주는 불사가 되길 간구하면서 절을 내려왔다.

칠장사의 역사는 혜소국사 비문에 잘 전해지고 있다. 국사는 고려 문종10년(1056)에 안성에서 출생하여 광교산(廣敎山)에서 머리를 깎았다. 칠현산에서 아란야(阿蘭若)를 세워 홍제관(弘濟館)이라 칭하고 좌선하다가 죽었다고한다. 혜소국사는 홍제관에서 일곱 악인을 교화하는 등 안성지역에 많은 족적을 남기고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충렬왕 34년(1308)에 절을 창건하고 그 명칭도 칠장사로 하였다고한다. 산 이름도 칠인의 악인을 현인으로 만들었다고하여 칠현산이라 하였다.

혜소국사비문은 귀비와 비신 이수가 모두 떨어져나가 당간지주 옆에 비신만이 홀로 서있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설이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가또(加藤淸正)가 북상하다가 칠장사에 들어왔다고 한다. 부하들을 시켜서 경내에서 닥치는 대로 분탕질을 하게 했는데, 갑자기 한 고승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왜장 가또를 향하여 신성한 법당을 어지럽히지 말고 물러가라고 호령을 하였다. 왜장 가또는 분기탱천하여 칼을 뽑아들고 그 고승을 내리쳤다. 그러나 고승은 간데 없고 혜소국사비만 두 동강으로 나 있었다([안성군지]). 혜소국사의 영험이 그만큼 강하게 남아있음을 전설은 알려준다. 칠장사는 한때 사서가 옮겨진 곳이기도 했다. 그만큼 절이 컸다는 말도 된다.

" 칠장사(七長寺)는 칠현산(七賢山)에 있고,신우(辛禑) 9년에 왜적이 함부로 내지로 들어오므로,충주 개천사(開天寺)에 감추어둔 사적(史籍)을 여기에다 옮기었다. 즉 권근(權近)이 배중원(裵仲員)을 보내어," 본조가 바다 동쪽을 차지한 지 수백 년에, 처음에는 국사(國史)를 가야산 해인사에 감추었는데,대개 후세에 난리를 만나서 잃어버릴까 염려함이다. 가야산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멀고 험하며,해인사가 가야산에서는 가장 궁벽하고 깊이 막혔기 때문에,국가가 비록 변이 있어도 난이 일찌기 미치지 않았으니,조종(祖宗)의 염려한 것이 깊고도 깊었다. 근래에는 왜적을 제어함에 기율을 잃어서,깊이 들어와 주와 현을 도둑질해가므로 가야가 거의 지키지못하게 되었다. 홍무(洪武) 기미년 가을에 그 사적을 선산의 득익사(得益寺)로 옮겼고,신유년 가을에 그 넘어 북쪽으로 와서, 충주의 개천사(開天寺)에 수운하였으며, 지금의 계해년 여름에 왜적이 또 충주의 옆 고을에 침입하자, 7월에 다시 죽주의 칠장사로 옮기었으니, 땅의 험하고 먼 것도 믿을 수 없고,적이 감히 깊이 들어오는 것이 이와 같으니,슬프다.이것으로 세상이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대목인데,중원지방을 거쳐 인근 칠장사로 급히 옮겼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왜구의 노략질이 내륙에 까지 깊숙히 미쳤던 것이다. 그뒤로 칠장사가 역사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사례는 아마도 인목대비(仁穆大妃)가 부친 김제남(金悌男)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위하여 칠장사를 원찰로 삼고 중건하면서 친필족자를 하사한 일이다. 이 족자는 칠장사에 비장되어오다가 현재는 경기도 향토사료실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진다. 인목대비가 원찰로 삼고 중창을 했을 정도라면 당대에도 만만한 절이 아닐 수 없다.

근대로 들어와서 칠장사가 세인에게 널리 알려지게된 것은 아무래도 벽초 홍명희(洪命憙)의 대하소설 임꺽정(林巨正) 덕분이다. 조선시대에 양반,평민,노비 등 각 계층의 삶과 갈등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천민 백정의 아들인 임꺽정을 통하여 민중들의 애환과 해방의 염원을 절절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우리 문학사가 낳은 손꼽는 역작 중의 하나이다. 정확한 사실과 풍부한 고증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언어와 의식,생활감정 등 '조선의 정서'를 재현시켜 근대역사소설의 전형이자 리얼리즘문학의 거봉으로 평가되는 임꺽정에서 벽초는 칠장사의 생불(生佛)을 등장시킨다. 갖바치노릇을 하던 은둔자가 만년에 칠장사에 있을 때 꺽정이가 자주 찾아뵙던 사람이다.

꺽정이가 사람들에게 스님에 대해 묻자," 병 있는 사람이 절 한 번에 병이 낫지요, 자손없는 사람이 스님 불공 한번에 자손을 보지요.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눈앞에 영검을 보고야 대접 아니할 수 있습니까? 죽산 안성 용인 근방 사람들에게 칠장사 생불님이라고 물으면 거의 모를 사람이 없습니다" 고 설명듣고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칠장사를 등장시킨 것은 나름의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참으로 혀가 내둘리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이만큼 우리 풍습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작가를 우리 문학사가 지니고 있다는데 일말의 기쁨으로 다가오면서, 한편으로는 오늘의 작가들이 과연 이만큼 우리 것을 알고 쓰는 것인가 하는 회의도 드는 탓이다.

이제 다시금 이죽면으로 빠져나와 삼죽면으로 향하였다. 일죽,이죽,삼죽, 그런 순서로 밟아나가는 것인데 난 이같이 번호붙은 동네이름은 딱 질색이다. 봉천1동,봉천2동,봉천3동......식의 기계화된 이들 이름들은 모두 일제의 식민잔재이거나 군사문화식 발상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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