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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

모악산에서 진표율사를 생각하다.

6,847 2016.04.29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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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과 금산사를 빼놓고서 전북일대의 미륵신앙, 나아가 한국의 미륵신앙을 설명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만큼 모악산과 금산사가 미륵신앙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막중하기만하다. 한국근대사에 요동쳤던 동학의 커다란 물줄기를 잡아내는 데도 이 지역은 중요하기만하다. 진표율사가 이곳을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만들었음은 그의 지향하는 바도 있었겠지만 이미 이곳을 중심으로 인근 일대에 백제미륵신앙을 이어받은 전통이 의연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표는 백제유민의 터전을 토양삼아 미륵신앙의 본거지를 집약시켰을 뿐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삼국유사}(권4)에 나타난 진표의 행장을 간략히 추려본다.

승 진표는 완산주(지금의 전주목) 만경현 사람이다. 나이가 열 두살에 금산사 숭제법사(崇濟法師) 문하에 들어가 몸을 붙여 머리를 깎고 중되기를 청하니 그의 스승이 한번은 말하기를,

" 내가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고명한 중 선도(善道)에게 가르침을 받고 그후 오대산에 들어가 문수보살이 감응되여 나타나 다섯가지 계률을 받았노라" 하니, 진표가 아뢰기를,

" 얼마나 공부를 하면 계률을 얻게 되나이까? "하니, 숭제가 말하기를, " 정성이 지극하다면 1년 넘을 것도 없느니라" 하였다.

진표는 스승의 말을 듣고 유명한 산들을 두루 돌아니다가 자기 몸을 학대하여 참회하는 망신참(亡身懺)으로 자기 몸을 쳐서 무릎과 팔이 다 부서지고 피가 언덕에 비오듯 흘렀다. 결국 14일에 망신참을 마쳤는데 지장보살이 현신하여 계율을 받게 되는데 그의 나이 스물 세 살 때의 일이다. 그러나 그의 지망은 미륵보살에 있었으므로 만만히 중지를 하지 않고 바로 영산사(靈山寺)로 옮겨 다시 처음 처럼 근면과 용기를 내였더니 과연 미륵이 나타나 점찰경(占察經) 두권과 증과(證果) 패쪽 189개를 주었다. 진표는 거룩한 문건을 받고 금산으로 와 있으면서 해마다 단을 만들고 널리 설교를 하니 단을 베푼 좌석의 정결하고 엄숙한 품이 말세에서는 볼 수 없었다. 불법의 교화가 고루 퍼지매 그는 유람 걸음으로 아실라주에 이르니 섬과 섬 사이에 어족이 다리가 되어 그를 물 속으로 맞아들여 설법을 하고 계를 받았다. "

{삼국유사}의 '관동 풍악 발연수 돌에 새긴 기록'({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는 그의 출생지를 전주 벽골군(碧骨郡)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 그가 열 두살에 출가하여 금산사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찾아가 중이 되니 순제가 공양차제 비법(供養次第秘法)과 점찰 선악 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두 권을 준 것으로 나타난다.

" 순제는 이르기를,"네가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과 지장 두 보살 앞에서 지성껏 빌어 참회를 하고 직접 계를 받아 세상에 전파하라"고 하였다. 유명산천을 돌아다니다가 760년에 쌀 스무말을 쪄서 이것을 말리워 양식으로 삼고 보안현을 찾아 변산 불사의(不思議) 방에 들어가 쌀 다섯홉으로 하루를 먹고 한홉은 덜어서 쥐를 먹이면서 그는 부지런히 미륵상 앞에서 계법을 구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수기를 받지 못하였다. 그는 열심을 다하여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더니 갑자기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손으로 받아 돌 위에 놓았다. 율사는 다시 발원을 하여 약 21일간을 밤낮 부지런히 수행을 하여 돌을 두드려가면서 참회를 하니 사흘이 되어 손과 팔이 꺾여져 떨어졌다. 이레째 되는 밤에 지장보살이 손으로 쇠 지팽이를 흔들면서 와서 쓰다듬으니 손과 팔이 전과 같아졌다. 보살이 이때야 가사와 바릿대를 주었다. 율사가 그 영험에 감복하여 전보다 갑절이나 열심을 들이니 만 21일만에 곧 하늘이 주는 시력을 얻어 도솔천 무리들이 오는 광경을 보았다. 이때 지장보살이 나타나 계율책을 주었고 미륵보살은 다시 패쪽 두 개를 주게된다. 9자와 8자를 쓴 패쪽은 미륵보살의 손가락뼈로 9자는 바로 불법이요 8자는 새로 부처가 되는 씨앗을 의미하였다. 진표더러 후생에 도솔천 하늘에서 날 것으로 예언한다.말을 마치자 두 보살은 사라졌고, 율사가 금산사를 세우고자 나타나니 갑자기 용왕이 나타나 옥가사를 받치면서 8만권솔을 데리고 금산사로 모시니 사방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못되여 이를 완성하였다고한다. 다시 감응이 있어 미륵보살이 도솔천으로 부터 구름을 타고 내려와 율사에게 계법을 주었다".

그리하여, {삼국유사}는 그를 다음과 같이 칭송하고 있다.

" 말세에 나타나서 몽매한 인간을 깨우치니
신령한 산과 개골에 감응이 통하여라
탑참을 전하기에 애썼다고만 말하지 말라
동해에 다리놓은 어족까지 교화시켰네 "

그는 금산을 중심삼아 미륵신앙운동을 펼치게된다. 진표가 쁹아다녔던 지역들은 모두 신라 중앙이 아니라 속리산,동해안 강릉,금강산 같은 외진땅들로 찾아가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다. 진표가 내세운 점찰법은 놀이와 점을 이용하여 대중을 신앙과 수행의 주체로 내세웠으니,민중들의 힘에 의거한 자력신앙을 강조한 것이다. 옛 고구려땅과 백제땅의 유민들, 특히 백제유민들 사이에 널리 퍼진 미륵신앙운동은 훗날 후고구려의 궁예,후백제의 견훤에 영향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훗날 견훤이 금산사를 원찰로 삼아 미륵신앙과 관계맺은 이유도 무관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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