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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

경기도 최대의 미륵불의 땅,그리고 태평미륵

6,553 2016.04.29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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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최대의 미륵불의 땅,그리고 태평미륵



경기도에서 안성만큼 미륵신앙이 널리 퍼진 곳도 없을 것이다. 안성의 미륵을 찾아나서는데 이상스럽게도 날짜를 잘 선택한다는게 매번 떠날 때는 맑았다가도 하룻밤만 자고나면 비가 오기 시작했다. 더우기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미륵도 많아 질퍽이는 산길을 걷는 경우가 많았다. 삼죽면 기솔리 답사 때는 비를 흠뻑 맞으며 한시간여 계곡을 걸어야 했다. 어쨌든 안성땅은 미륵신앙이 널리 퍼진 곳임을 '온몸으로' 확인하는 계기였다. 그렇다면 안성에 미륵이 많이 모인 까닭은 왜일까. 하나 하나 찾아가보기로 한다.

경기도 최남단에 자리잡은 안성은 경기도와 충청남북도의 접경이기도 하다. 읍내를 정점으로 덕성산, 서운산, 칠현산 같은 차령산맥 줄기에 둘러 싸인 넓은 평지를 이루어 곡창지대가 형성되었다. 전형적인 비산비야의 군세로 지금의 안성은 안성공단, 중앙대 안성캠퍼스 등이 자리잡았을 뿐더러 인접한 용인군과 더불어 골프장이 들어서서 산을 깎아낸 흉물스런 모습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안성은 고구려와 백제의 옛땅이었다. 남진정책을 감행한 고구려의 최남단 전선은 당성군(경기도 남양),부산현(경기도 진위),사벌홀(안성군 양성면) 정도였다.즉 장수왕조에 남하정책을 추진한 이래로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면서 영향을 받다가 한강유역을 상실하면서 다시 백제땅이 되었고 이후에 신라로 복속되었다. 문화적으로는 접경지대에 자리잡은 셈인데 어쩐일인지 안성땅에는 미륵이 유난히 많다. 아마 전국을 통털어서 안성만한 넓이에 미륵불이 집중적으로 모인 곳도 드물 것이다. 먼저 태평미륵(太平彌勒)부터 찾아나섰다.

중부고속도로 일죽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안성읍내 쪽으로 향하다보면 이내 죽산천을 건너게되며,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매산리의 죽주산성(竹州山城)이 나온다. 태평미륵은 바로 죽주산성을 등지고 죽산천을 바라보며 서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경기도 최대의 미륵불인 태평미륵이 전해진다. 파주군 광탄면에 거대한 마애미륵불이 있다면 이 곳에는 석불형식으로는 제일 큰 미륵이 모셔진다.

매산리는 삼거리를 끼고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죽주산성이라고 불리는 고려시대 산성이 매산리의 비봉산정을 따라 길게 축성된 밑으로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중간쯤에는 제법 격식을 갖춘 2층 높이의 누각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름하여 미륵당이다. 비교적 넓은 마당에는 잔디가 심어져 있고 높이 솟은 누각 밑으로 미륵불이 보인다.

태평미륵이 세워지게된 배경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시대 기원설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기원설이다. 고려시대 기원설은 몽고침입과 관련이 깊다. 원래 죽주산성 자체가 싸움터였다. <<고려사>> 권103 박서(朴犀) 송문주(宋文胄)전을 보면 큰싸움이 이곳에서 전개된 것을 알 수 있다.

" 고려 고종 13년에 송문주가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이 되었는데,몽고가 죽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므로,성중의 사졸이 나가 쳐서 쫓았다. 다시 포를 가지고 마주 공격하자,몽고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몽고는 또 사람의 기름을 준비하여 짚에 부어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중의 사졸이 일시에 문을 열고 돌격하니,몽고군의 죽은 자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몽고는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조정에서는 몸고와 강화에 급급하면서 일신의 안전만을 도모할 당시에 모처럼 승전고를 울려준 곳이다. 송문주가 잘 물리친 것은 몽고 제1차 침입시에 귀주성 공방전에서 박서와 함께 혁혁한 공을 끼쳐 이미 몽고군의 전술을 훤히 익혔기 때문이다. 박서도 같은 죽주 출신으로 몽고의 살례탑을 무찌른 귀주대첩(龜州大捷)의 명장이었다. 오늘날 죽주산성에는 송문주의 사당이 전해지고 있어 사실로 확인된다. 죽산산성에 전해지는 '오뉘 힘내기' 전설에서도 '송재장군'이란 이름으로 송장군이 등장하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의 전승력이란 무서운 것이다([한국구비문학대계]1-6권).

미륵은 송장군과 처인성에서 살례탑을 사살한 김윤후(金允候)의 우국충정을 추모하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처인성은 오늘날의 용인이니 안성 바로 윗쪽이다. 안성 동쪽방향인 충추성을 비롯하여 인근일대가 모두 몽고군과의 격전지였으니 백성의 피해는 이루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승전을 거둔 두 장군에 의탁하여 거대 미륵불을 세우고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태평미륵이란 이름이 붙었는지도 모른다.

또다른 이야기로는 조선후기 영조때에 최태평(崔太平)이라는 사람이 세운 미륵이라하여 태평미륵이란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최태평이 인생의 무상을 깨닫고 무학수덕(無學修德)의 극락도(極樂道)를 열고자 건립한 것이라고도 한다. 아마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 후기에 미륵신앙이 다시 조망되면서 최씨 성을 가진 어떤 도인이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해석되지만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죽주산성을 논하면서 태평원(太平院) 북쪽에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미 그 당시에 태평이란 말이 등장하는 것이다.

태평원이 있었다는 말도 재해석을 해야한다. 안성의 죽산땅은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라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다. 따라서 원이 있었음은 일종의 숙박시설을 의미한다. 미륵원이라는 곳은 고려시기문헌에 무수히 등장한다. 황해도 봉산땅 자비령(慈悲領)의 미륵원은 고려 고종7년에 세워졌고,향을 피우고 옷을 베풀어주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온다. 이로써 원의 기능이 단순 사찰만이 아니라 자비를 베풀어 지나가는 나그네를 쉬게하는 숙박시설같은 곳이었음을 알게 한다. 중원의 미륵대원,노령고개의 미륵원 같이 원에 거대 미륵을 세운 경우가 많았기에 태평미륵의 위치도 원과 결부하여 생각하여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사람이 빈번하게 나다니는 교통의 요지에 거대미륵을 국가적으로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거대불이다. 미륵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아침에는 햇살이 온몸에 퍼져 그윽한 인상을 던져준다. 높이가 6미터이고 둘레만도 3.17미터다. 정방형의 머리덮개가 무려 1.5미터에 달하는 육척장신의 거구다. 원만한 얼굴, 긴 눈과 낮은 코, 작게 조각된 입, 그리고 귀는 볼에 납작하게 붙어 목부분까지 늘어져 있다. 체격에 비하여 좁은 어깨는 약간 처진편이며 우측팔은 구부려 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했고 왼팔도 앞으로 모으고 있다. 몸통에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아 원통대의 형식으로 매우 투박하게 조형된 미륵이라 솜씨가 없다는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두 다리의 가랑이도 정확하게 홈을 파서 만든 탓으로 조형성이 뒤떨어질 뿐더러 크기에 비하여 몸체 비례가 잘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름 그대로 태평스런 느낌을 던져준다.

문제는 왜 이렇게 조형했는가 하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지방양식으로 널리 유행된 육척의 거대한 미륵불 조성이 안성에서도 반복된 대표적인 사례로 이 태평미륵을 주목할 수있다. 안성사람들 역시 이 같은 거대 미륵불을 통하여 미륵세계의 구원을 서원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태평미륵은 지역 문화재로 지정되었을 뿐더러 보존도 잘 되고 있는 형편이다. 3미터가 넘는 돌기둥 6개를 세우고 장목을 얹어 만든 누각자체가 거대할 뿐아니라 비바람으로부터 완벽하게 미륵을 보존해 주는 탓으로 조형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마당에는 오층석탑도 가져다 놓아 흡사 절터같은 인상도 준다. 그 오층탑은 고려시대탑으로 각 부재가 정연하고 짜임새있게 결구되어있으나 규모는 작은 편이다.

예전에는 담장도 없이 동네 복판에 미륵만 덜렁 서 있었다고 한다. 옆집 민가에 보살 하나가 살면서 돌보다가 근년에 이 곳을 떠났다고 전한다. 현재 옆집에 살고 있는 조희재(39)씨 말에 의하면 지금도 해마다 정월과 칠월 칠석날에는 인근 일대에서 떡을 해 가지고 치성을 드리러 온다고 한다. 촌로들의 증언에 의의하면 태평미륵의 돌을 갉아먹으면 누구나 아들을 출산할 수 있다는 속신이 전해진다고 한다. 후대에 기자신앙이 첨가된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미륵의 몸체에는 여러 곳에 작은 상처가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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