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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

모악의 미륵

6,902 2016.04.29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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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母岳),이름하여 어머니산을 찾아간다.

어머니는 늘 경외의 대상이고 위대함 그 자체다. 가장 친근하면서도 위대함을 지닌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진 산,그 모악산은 한국미륵운동사상 가장 핵심적인 비밀을 간직해왔다. 모악이란 산이름은 전국적으로 많다. 조선초기 천도(遷都) 과정에서 한양과 모악이 양자택일되었던 역사적 사례,시대를 더 올라가 동진을 통하여 백제로 들어온 불교가 영광을 거쳤으며, 그 영광땅에도 모악이 있어 불갑사가 전해지고 있으니 지명내력을 우연한 일들로만 돌릴 수는 없다.

금산사(金山寺)를 찾아가는 길이다. 새해 벽두부터 88올림픽으로 시끄럽게 시작한 1988년의 신년을 모악산답사로 시작했다. 1월 마지막날 역사문제연구소민중생활사연구반에서 모악산과 금산사,원평을 답사하기로 했다. 꼬박 6년 전의 일인데 이이화선생과 동학연구가 우윤선생,종교사가 진철승선생,미술사가 유홍준선생,그리고 오병수 기자와 필자가 대동했다.

첫날 답사는 전주에서 출발하여 27번국도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 구이저수지를 끼고 모악산으로 올랐다. 구이저수지에서 오르다보면 대원사와 수왕사를 거쳐 모악산을 관통하여 바로 금산사에 닿게된다. 모악산을 종주하려는 심사였는지라 가벼운 마음으로 산을 기어올랐다. 별다른 산행준비 없이 왔음에도 등반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겨울산행은 늘 신선하게 느껴진다. 우선 추운 날씨임에도 산을 오르다보면 열이 오르면서 차가운 바람이 마주치는 묘한 청량감을 선사하곤 한다. 다행히 날씨는 쾌청해서 바라보이는 전망도 좋았다.

차츰 산이 가파라지기 시작했다. 서낭당이 나타났고 요즘 세운 것으로 보이는 목장승도 나타났다. 산고개에 서낭당과 장승이 있음은 이 지역이 민간신앙의 만만치 않은 성소임을 예고편으로 보여주는듯 했다. 이내 대원사가 나타났다. 대원사는 증산이 1901년 7월 5일 대각한 곳으로 알려진다. 그는 대원사에서 1년동안 수련하는 동안, 마지막 49일간은 불음불식하면서 천지대도를 깨닫게된다.

대각(大覺)한 후 이웃 구릿골(銅谷)에서 9년간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게 된다. 대원사는 산비탈에 세워진 자그마한 암자에 지나지 않지만 진묵대사(震默 大師) 영정과 목각사자상(木刻獅子像)이 일품이다. 증산이 성도했다는 칠성각은 뒷편에 떨어져있는데 문짝이 떨어져나간 상태로 보존상태가 엉망이었다. 증산이 대각을 이룬 곳이라고 보기에는 형편 없을 정도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왜 하필 산신각 같은 데서 대각을 이루었을까. 그의 종교적 지향점이 민중들이 보편적으로 믿어왔던 민간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좀더 산을 올라 수왕사를 거쳐 정상으로 올랐다. 너르디너른 김제와 정읍의 들판을 한 눈에 펼쳐진다. 모악산이 실제로는 높지않되 인근 일대의 너른 곡창지대에 비하면 보통 높은산이 아니다. 끝없는 들판에 우뚝선 이 산이 옛사람들에게는 어머니품으로 다가왔기에 모악이란 이름이 붙었으리라. 산이 들을 굽어보고,들이 산을 품에 앉은 격이다.

모악산 무제봉은 조선시대에 기우제터로도 유명했단다. 비가 심하게 오지않아 초목이 타들어갈 정도가 되면 동네에서 행하는 자그마한 기우제로는 감당할 재간이 없게된다. 이윽고 국가 차원에서 기우제를 하게되는 바, 무제봉에 올라가 나무를 연신 태워 하늘에 고하게된다. 연기가 오르면 비가내린다는 속신은 당대 사회의 어쩔수 없는 유감주술(有感呪術)이었겠지만, 그런 일을 치르고나면 대개 비가 와준다고하니 쩍쩍 갈라진 논두렁을 굽어보는 하늘도 무심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끝까지 갈데로 간 마당에 기우제를 올리니 이윽고 비가 올것은 자명한 이치라고 판단해도 괜챦을 성 싶다. 모악산이 무언가 종교적인 성소로 불리워왔다는 또 하나의 증거물이 되겠다.

모악산은 역사시기 이전부터 오랜세월 민간신앙의 성소로 자리잡아왔다. 실제로 모악산에는 고대 선사시대 사람들의 신앙터인 알터신앙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어 예로부터 성소였음을 알려준다. 알터란 바위에 알같이 생긴 동그란 구멍을 남긴것이니 모악산에 알터가 있는 것이나 미륵사지가 자리잡은 용화산에도 알터가 남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면 될 것이다. 알터를 보면 묘한 생각이 든다. 옛선인들이 바위에 모여 무언가를 희구하면서 열심히,참으로 열심히 돌을 비벼서 간구했으리라. 선사시대 신앙터가 역사시대로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종교적 기능을 잃지않고 연속성을 확보하고 있는데서 모악산이 돋보인다.

토착신앙의 바탕 위에 불교가 들어왔고,상호 싸우기도하고 타협도 이루면서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토착신앙과 들어온 불교와의 갈등도 당연히 있었을 터이니 이차돈의 순교에서 처럼 이적(異蹟)을 보이는 순교가 등장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갈등관계를 반증해준다. 토착신앙의 본거지에 절이 들어섰고, 나중에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율사(眞表律師)같은 당대의 걸물을 만나면서 모악산은 미륵신앙의 본격적인 본거지로 작동하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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