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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신앙과 결합된 기솔리 미륵

3,043 2016.05.1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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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신앙과 결합된 기솔리 미륵

 

삼죽면 기솔리로 접어드는 산길은 넓게 비안개가 퍼져 지척의 산야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삼죽면의 기솔리와 마전리 사람들이 모셔왓다는 미륵들은 국사봉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전국민학교를 조금 더 지나서 오른쪽으로 계속 올라가는데 덕기실,윗말,음달말,웃말로 그대로 가야한다. 말하자면 국사봉 산자락이 양옆으로 길게 퍼진 산자락 사이로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고 그 정점에 미륵사가 자리잡고 있다. 차가 더이상 들어가질 않아 입구부터 걸어올라가야 한다.

오늘날의 미륵사는 불과 8년여전에 어느 스님이 들어와 창건한 절일뿐, 그 전에는 폐사지에 불과했다. 기솔리에서 바라보면 산중턱에 거대한 미륵 2기가 웅장하게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말하자면 기솔리 사람들의 신심을 모두어 주던것이 그들 미륵이었다.

미륵상에는 도합 5기의 미륵의 전해진다. 2기는 기솔리를 바라보면서 중턱에 서서 대웅전과 요사체 뒤에 자리잡고 있으며 3기는 국사봉정상에 자리한다. 미륵사에 도착하여 냉수 한 바가지를 마신 연후에 주지 법도스님의 도움을 청하였다. 스님은 송광사 문중으로 9년여 전 부터 이 절을 지켜왔다고 한다. 미륵이 있는 중턱인지라 땅이 좁아 길게 요사체와 법당을 꾸려놓았다. 예전의 건물터였던 미륵있는 곳에도 법당을 꾸려놓았다. 힘든 불사를 해온 셈이다. 법도스님은 몇가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도선국사가 이곳 미륵사에 있다가 인근 칠장사로 갔으며, 예전에는 이 미륵사터가 안산의 본산이었다고 한다. 지형적으로 볼 때 국사봉(438미터) 건너편에 바로 마주보이는 봉우리가 칠장산(492미터)이니 거리상으로는 어떤 연관이 있을 법도 하다. 국사봉은 인근 보개면이나 삼죽면에서는 가장 높은 영산으로 국사신앙터라고 할 수 있다. 절로 들어서자면 만나게 되는 풍치있는 바위는 무선바위라 부르며 선녀가 하걍하여 춤을 추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아랫동네 기솔리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국사봉 전체가 절골이었다고 한다. 실제롤 탑신이 나왔고 몸체없는 부도 뚜껑도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법도스님이 처음 왔을 때는 미륵 옆에 움막집이 하나 있었고 무당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민간신앙 요소가 강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현재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절터에서 보자면 이들 불상 역시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이 지역 장륙불상의 전형임을 알 수있다. 높이가 5미터를 넘는 장신의 남미륵과 여미륵이 공존하고 있다. 각기 하나의 큰 돌에다 손, 어깨 등을 지극히 단순하게 조형했다. 동쪽의 체구가 굵고 약간 큰 미륵을 남미륵, 서쪽의 약간 가늘게 생긴 미륵을 여미륵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미륵 쪽에서 산아래 계곡을 바라보자면 인근 일대의 기솔리와 마전리가 전부 굽어보이는 형국이다.

말하자면 예전에 절이 있던 계곡인데 절이 폐사된 연후에는 인근 마을사람들만의 미륵신앙으로 전해지다가 최근에 개인사찰로 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기솔리의 미륵들은 국사봉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보다 분명하게 민간신앙적 속성을 보여준다.

남미륵과 여미륵 있는데서 20여분 올라가면 국사봉에 닿는다. 국사봉 정상에는 거대한 바위 3개가 서있는데 흡사 기자바위 같기도하고 조각을 하다가 중도에 그만둔 석불의 형상같기도 하다. 국사봉에 자리잡은 흔한 바위신의 전형적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국사신앙은 마을에서 마을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올리는 당굿이나 서낭굿,당산굿 따위와 달리 보다 포괄적이고 넓은 지역을 관장하는 신앙성을 보여준다. 으례 국사당,혹은 국사봉 같은 식으로 신앙대상이 정해지는데 기솔리 국사봉은 세 바위가 경배대상인 것이다.

자연석을 축대삼아 새로이 조성한 대웅전과 요사체가 있어 단아한 절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절을 누르듯이 서있는 거대한 3기의 바위들은 그 자체가 삼신신앙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국사봉이란 것 자체가 민간신앙으로는 국사신앙으로 모셔질 뿐 아니라 지극히 민간신앙인 요소를 갖추고 있는 탓이다. 말하자면 과거의 절터와 민간의 국사신앙이 어우러져 미륵을 중심으로 종합적인 신앙터를 이루었던 현장으로서 기솔리 미륵들은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국사봉 바로 옆에는 단정하게 모셔진 미륵 3기가 있는데 중턱의 남녀미륵과는 전혀 달리 작고 아담한 형상이다. 국사봉 미륵은 궁예의 전설과 관계가 깊다. 스스로 미륵의 화신이라하여 무리를 이끌고 세력을 이루었던 궁예는 인근 북좌리에서 도를 닦고 있었다. 북좌리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바, 그 기도처에서 이리로 와서 국사봉의 미륵불 3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좌불은 문관, 우불은 무관, 중앙불은 자신을 상징하여 문무를 거느린 형세를 조형화하였다는 것이다.

왼쪽 미륵은 보검을 들고 서있고 오른쪽 미륵은 약병을, 가운데 미륵은 키가 약간 큰 미륵으로 궁예자신을 표현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들 삼불은 흡사 삼존불을 모신 형상이다. 모두 보관을 쓰고 있는데 지극히 소박한 양식이다.

안성땅에 와서 궁예라니 ! 그러나 그 의문은 쉽게 풀렸다. 죽산지방이야 말로 기훤(箕萱)이 봉기한 곳이 아니던가. 신라하대 진성여왕조에 각처에서 호족세력이 봉기를 거듭할 때,안성의 죽산에서도 기훤이 일어섰다. 기훤이 상당한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음은 당시 궁예와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삼국사기>>열전 궁예조에서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

" 신라말년에 정치가 거칠어지고 백성들이 분산되었다. 왕성을 중심한 지역 고을들 중에서 신라 조정을 반대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으며 ,이곳저곳에서 뭇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같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선종(궁예)이 생각하기를, 이 어지러운 때를 타서 무리들을 끌어모으면 자기의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진성여왕이 왕위에 있은지 5년에 죽주에 있는 반란군의 괴수 기훤에게 갔다. 그러나 기훤이 오만무례하므로 선종의 마음이 침울하여 안정을 얻지못하고 있다가 기훤의 부하인 원회,신헌 등과 비밀리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마침내 신종은 경복 원년(892년) 북원(원주)의 적(賊) 양길(梁吉)에게 가니 양길은 궁예를 잘 대우해주고 일을 맡기었다."

궁예가 기훤을 찾아갔고,휘하의 부하장군들과 내통하여 기훤의 영역을 벗어났다는 말은 그만큼 기훤 세력이 한때 막강하였음을 보여준다. 죽산을 중심으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말이된다. 따라서 기솔리 국사봉에 궁예의 화산이 남아있는 것이 전혀 무관한 일은 아니다.

누가 이들 삼불을 조성하였을까. 조각양식이 소박하다못해 다소 조잡하기까지 느껴지는데 누군가 궁예를 기리면서 후대에 세웠다는 말이 된다. 문관,무관 식으로 느껴지는 수인도 실제로 일반적인 미륵불에서는 없는 것이다. 미륵을 자칭하다가 못내 죽음을 당한 궁예의 한이 멀리 안성땅에서 피어오른 것이다. 기솔리사람은 누구나 그 석불을 궁예라고 불렀고,궁예미륵이 상당히 영험하다고 했다. 또한 국사봉 미륵불 밑에서 나오는 샘물에는 약효가 있어 질병치료에 그만이라는 소문이 퍼져 치병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온다고 한다. 마을에는 애낳게 해달라는 기도 후, 꿈에 죽순이 솟는 선몽을 하고 실제로 달덩이같은 아들을 얻었다는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역시 기자신앙과 결합되어 있다.

기솔리사람들과 마전리 사람들이 주로 많이 다니며 멀리 서울에서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고 널리 알려지지않아 절 운영이 쉽지만은 않다고 주지스님은 전해준다. 2년 전에는 아래 요사체에 머물더니 위윗쪽으로 올라온 법도스님에게 한가지를 되물었다. 이들 미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따위의 다소 알량한 질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난다. 스님은 미륵이나 자장이나 그것을 찾는 사람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다 한 가지로 같은 것이 아니겠는냐는 식의 답변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맞는 말이다. 어떤 것이라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어떤 것인들 제대로 보이면 되는데,제대로 볼 줄을 모르는게 문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무려 세 시간이나 지났다. 제행무상의 얘기도 나왔고, 불교는 물론 모든 종교가 제법을 지켜야 종교구실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했다. 필자같은 학자들이 학문적으로 많이 알고 경도 제법 읽었겠지만, 글로 읽지 마음으로 읽지 않는다는 비판도 빼놓지 않았다. 장마비에 패인 산길을 잠시 내려오니 벌써 안개가 미륵불을 휘감아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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