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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어떻게 믿을 것인가?

9,151 2016.04.18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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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어떻게 믿을것인가
                                 
       

                                                    병고 고익진
                                                       
   
      <1> : 종교 선택의 어려움
       
      요즘 세상은 믿을 것이 없다고 한다. 남은 말할 것도 없고  친구
    나 친척, 심지어는 처자까지도 믿을것이 못된다. 뉴스나 광고는 물
    론이지만, 학설까지도 견해가 엇갈려 어떤 쪽을 따라야 할지 알 수
    가 없다.

      재산과 권리와 명예라는 것은 본래부터 덧없는 것이지만, 심지어
    는 종교와 성직자까지도 불신을 받고 있다. '불교, 어떻게  믿을것
    니가'라는 주제는 불교신앙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믿음의 방법을
    묻고 있는 말이지만, 불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불신의 뉘앙
    스가 먼저 풍기는 것은 아이러니칼하다.

      그러나 인간이 믿음이 상실하고 살 수가 있을까? 오늘 힘들여 일
    하는 것은 내일을 믿기 때문이고, 오늘 힘들여 가르치는 것은 다음
    세대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내일은 차지하고라도, 지금 이 시점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무엇인가를 믿고 그것에 의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 존재를 가능케 하는 정신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흔들릴 때 인간은 불안해지고, 그것이 제약될 때 인간은
    외로워지고, 그것이 사라질때 인간은 죽게 된다. 반대로 그것이 일
    어날때 인간은 소생하고, 그것이 확장되고 뜬뜬해질때 인간은 외로
    움과 불안을 극복하여 밝고 힘찬 삶을 맏게되는 것이다.

      믿음은 이와같이 인간존재의 정신적 바탕이 되기에, 사람들은 믿
    음의 위험성을 겪으면서도 믿음을 또한 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번 속은 친구라면 아예 돌아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두번 세번  속는
    것은 어리석음 때문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믿고 싶은 인간성의 나약
    함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인간성의 나약함은 재산의 파탄이나 불치병과 같은  절망
    적인 상황에서는 더욱 절실하게 믿음을 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뮬
    에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아무교설이나 닥치는 대로  믿
    음을 일으킨다. 그리고 간혹 그런 맹목적인 믿음은 강렬하고  순수
    한 만큼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내는 절대적인 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믿음은 그 내용이 진리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위대한 것이
    라고 말하고, 그런 믿음이 종교적 믿음의 특징인 것처럼  생각되기
    도한다.

      그러나 그러한 맹목적인 믿음을 진정한 종교적 믿음이라고 할 수
    가 있을까? 진정한 믿음이란 끝내 허망하지 않은 영원한  것이어야
    할것이다. 따라서 그 대상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어야 하고, 일시
    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어야 하고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보
    편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의 대상은 우리주변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종교라고
    해야할 것이다. 인류가 발생시킨 여러가지 문화현상중에서  영원한
    진리와 진정한 가치를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래도 종교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종교현황은 어떤가. 불교를 비롯해서
    기독교.유교.도교.무속 등과 같은 여러가지 종교관념이 날립해  있
    다. 공사주의적인 유물론도 고대사회에서는 일종의 종교관념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 종교가 내세우고 있는 진리의  내용은  왜
    그렇게 서로 다른가?

      불교에서는 세계를 인간의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고,  기독교에서
    는 하느님의 창조라고 하고, 유교에서는 음양의 원리에 의한  것이
    라 한다. 영원하고 궁극적인 진리는 하나여야 할 것인데, 왜  이렇
    게 각 종교의 주장은 서로 내용이 얻갈리는 것일까? 종교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자 할때, 우리에게는 다시 이런 문제가 대두되는  것
    이다.

      이럴경우 이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어느 종교이든 하나를 골라 덮어놓고  믿는길이
    고, 다른 하나는 각 종교의 교설에 관심을 갖고 그것이 과연  진리
    인가 아닌가를 먼저 문제로 삼아보는 경우이다.

      이런 두 가지 방향에서 어떤 쪽을 택할 것인가는  각자의  자유
    이겠지만, 전자는  Й코 종교적 자세라고 볼 수가 없다. 왜  그러냐
    면 종교는 항상 영원한 진리와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
    문이다. 그리고 아무 종교나 하나 골라 덮어놓고 따른다는  그러한
    마음은, 그것이 바라는 세속적인 물질적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에는 언제라도 딴곳으로 누을 돌린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적 믿음은 무엇보다도 먼저 종교적 교설의 진
    리성 여부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먼저 확인코자 하는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적 믿음의 선행조건을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이제
    판단이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그것은 아직 믿음의 단계에도  들어
    가지 못한 사람의 어떻게 그 종교에서 설하는 교설의 내용이  진리
    인지 아닌지를 헤아릴 수 있게느냐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하고,  불교에서도
    참다운 진리는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주고 받을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믿어 보기도 전에 교설의 내용이 진리인지 아니지를 알고
    자하는 것 부터가 잘못이요 오만이라고 해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범속한 인간의 지적 능력이 아무리 불안전 한것이라고 해
    도, 선.악이나 진위와 같은 것을 전적으로 식별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불안전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서도 인간은 신을 완전하게는 할  수  없지
    만, 신이 스스로 그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함으로써 인간은 신에 대
    한 부분적인 지식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결혼 대상을 고를때 먼저 그 사람이 믿음직  한가
    아닌가를 살펴보듯이 종교에 대해서도 과연 그것이 믿음직한  진리
    인가 아니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 믿음의 자세
      이런 견지에서 필자는 오늘 주제로 내세워진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그것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아닌가에서부터 우선 생각해
    보고자 한다. 부처님 계시던 B.C. 5~6계기경의 인도 사회는  '브라
    흐만(범)'이라는 신적 존재를 우주의 창조주이자 본질로 믿는 정통
    적인 브라흐마니즘이 있었고, 다시 이에 맞서서 세계의 근원을  몇
    개의 물질적 요소로 보는 사문들의 다양한 종교사상이 대립하고 있
    었다.

      고타마 싯다타가 당시의 그러한 두 계통의  종교사상을  믿어보
    고, 닦아보고 그 궁극적인 경지를 체험해 보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
    이다. B.C. 5~6 세기경의 인도사회와 20 세기의  현대사회를  동일
    선성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와 현대의 종교관념을 비교해 볼 때 그들 사이에 근
    본적인 다름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브라하마니즘의 범신론(汎神論)과 기독교의 유일신관은 크게 다
    른 것  같지만,  브라흐마니즘의  원천이 되고있는  리그베다의 종
    종교에는  유일신  관념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
    요소에 대한 당시의 견해는 지.수.화.풍 사대설이 기본적이고,  현
    대과학에서는 104 원소설이 기본적인 것이지만, 이것 또한 분석 기
    술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지 철학적 사유의 패턴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여러 종교사상을 믿어보고 체험해 보았던 고타
    마 싯다타의 종교적 구도의 편력은 오늘날 우리들이 '어떤 것이 과
    연 믿을만한 종교인가'를 문제로 삼았을 때 일어날 판단의  어려움
    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대신 받아 십자가에  못박혔
    듯이, 고타마 붓다는 인간의 힘든 종교적 방황을 대신  받아  겪어
    주셨다는 말이다.
      고타마 싯달타는 당시의 여러 종교가 문제성이 있다는 것을  발
    견한 뒤에는 곧 그들과 결별하여 붓다가야의 조요한  숲을  찾아가
    그곳에서 독자적인 선정에 잠겨 마침내 진리를  개달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진리를 세상에 나가 설한 것이 바로 불교인데, 그
    러한 전도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항상 '깨달은 자'로  자처하고  있
    다. 뿐만 아니라  다른 중생들도 모두 노력만 하면 다  같이  그런
    깨달음을 이룰 수가 있음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의 바라문들은 어떠했던가? 그들은 오직  자기들
    만이 '브라만'신의 입에서 태어나 '신의 아들들' 임을 자처하였고,
    브라만 신과 교섭하고 제사를 집행할 수 있는 것도 오직 자기들 뿐
    이라고 주장하였다. 부처님과 이들 바라문과 양자에서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부처님은 그가 깨달은 진리가 너무나도 깊고  미묘하여  일체의
    언어와 사유를 초월한 것이므로, 이것을 중생들에게 깨우치기 위해
    서는 부득이 언어와 사유를 동반한 점진적 방편을 시설할 수  밖에
    없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자기의 언어적 교설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저 언덕에 건너간 다음에는 마땅히 버려야할
    뗏목과 같은 것이니,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항상 그 뜻을 생각하라
    고 간절히 설하고 계신다.

      그러나 바라문들은 어떠했던가? 자기들의 베다 성전은 하늘에서
    들은 '쑤루티(s'ruti)' 곧 '신의 계시'임을 강조하고 그곳에  씌어
    있는 일자일구도 모두가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불교경전에도 물론 '여시아문(如是我門)'이라는 말이 맨 처음에
    붙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이 스승의  말씀을
    들었다는 뜻에 불과한 것이다. 불교와 브라하마니즘의 이러한 경전
    관에서 어떤 쪽이 더 진실을 말하도 있는가는 각자가 생각해 볼 일
    이다.

      부처님은 자기의 교설이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삼승'이라는 중
    층적 조직을 가진 미묘한 것이지만, 그러한 법을 들은 자가 누구나
    다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열반과 열반
    에 이르는 길은 분명히 있고 자기는 그것을 가리켜  주지만,  가고
    안가고는 각자에 달린 일로써, 자기인들  어떻게  하겠느냐"하시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믿음을 통해 모든 사람은 다 병이  낫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도, 부처는 낫는 사람도 있고 낫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솔직하게 대답하고 계신다. 브라만 신에 대한 기도와 제사를  통해
    인간의 문제는 무엇이나 해결된다고 말했던 바라문들의 주장과, 위
    와같은 부처님의 자세는 좋은 대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비교는 이밖에도 계속해서 많은 예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두 종교가 갖는 근본적인 입장의 차
    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렇게 근본
    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근본적인  면에서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인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
    리라고 본다.

      부처님이 처음 바라나시에서 교진여 등 다섯 비구를 상대로  법
    바퀴를 돌리시고 그것이 급속도로 인도사회에 퍼져나갔던 것은  당
    시의 사람들에게 불교의 그러한 진실성이 발견되었기 때문일  것이
    다.

      여러 종교가 나립해 있는 상황에서 어떤것이 믿음직한 중교인가
    를 알아내는 어려움이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해결될  것으로  보는
    데, 이밖에도 여러가지 경로와 인연을 통해 사람들에게 종교적  선
    택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러한 선택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제  그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일으켜야 함은 당연한 순서이다.

      불교에서는 입문자가 제일 먼저 갖추어야 할  그러한  믿음으로
    '사불괴정(四不壞淨)'이라는 것을 설하고 있다. 불법승 삼보와  계
    (戒)에 대해 확고부동한 철저한 믿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또 모든 불교인은 항상 '육념(六念)'을 해야 한다는데 그것은 이전
    의 네가지 믿음의 대상에 보시와 하늘의 과보(生天)를 추가한 것으
    로 그 여섯가지를 항상 생각하라는 뜻이다.

      인간은 타고 나면서 다섯개의 감관을 갖고 인식과 활동의  작용
    을 하고 있다. 불교에 입문하여 수행하게 되면 그 위에 다시  새로
    운 다섯개의 감관(五根)이 더 발생하여 다섯가지의 힘(五力)을  지
    니게 된다는 것이 오근과 오력이라는 교설인데, 거기에서도 믿음이
    제일 앞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런  믿음을  통해  '정진(精
    進).념(念).정(定).혜(慧)'가 형성된다는 뜻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다. 이러한 믿음은 '의심'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따라서 원시경전에서는 다시 수행을 통해 극복되는  번뇌  속에
    끊임없이 의심을 포함시키고 있으니, 인간의 청정한 본성을 가리고
    있는 오개(五蓋)의 내용도  '탐(貪).진(瞋).수면.도거(掉擧).의(疑)'
    로 되어 있으며, 불환과(不還果)에서 단절된다는  오하분결(五下分
    結)의 설에도 '탐(貪).진(瞋).유신견(有身見).계금취견(戒禁取見).
    의(疑)'로 되어 있어 의심이 항상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절대적 믿음에 대한 이러한 요청은 대승경전에는  더욱  강력하
    게 나타나고 있다. 금강경에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신심
    (信心)이 청청하면 곧 실상(實相)을 생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 사
    람은 가장 희규한 공덕을 성취하였느니라" 고 설해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법의 그러한 실상은 너무나도 심오하고  미묘하여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다 알 수 있을 뿐 그 밖의 사람은  심지어는
    보살들까지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법화경은 설하고  있
    다.(권 2 방편품).

      그러면서도 "여러 보살중에서 신력(信力)이 견고한 자는 제외한
    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으니, 이것은 깨달음의 세계가 아무리 들어
    가기 어려워도 '믿음'으로서 능히 들어갈 수 있음을(以信能入)  증
    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 보살의 구도 과정을 자상하게 설
    해나간 것이 화엄경이다.

      따라서 그곳에서 보살은 무엇보다도 먼저 불법승에 대해 절대적
    인 믿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고, "믿음이야말로 보살도의  근원이
    요, 공덕을 낳는 어머니요, 의심의 그물을 끊고 무상(無常)의 길을
    열어준다"(권 14 현수품)고 설해지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 있어서의 이러한 믿음은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
    에서 말하는 믿음과는 그 성질이 판이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
    다. 전자에 의하면, 신은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주(主)요,  인
    간은 피조물이므로 인간은 마땅히 주의 뜻에 따라 종(종)이 되어야
    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데에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처'는 절대적인 진리를 깨달은 자요, 중
    생은 그러지 못한 자이므로, 마땅히 부처의 교법에 따라  수행해야
    만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원시경전의 사불괴정에는 '불.법.승' 삼보가 신앙의  대
    상으로 설정되고 있으며, 기신론에는 그러한 삼보에 '절대적  진리
    (진여)'를 하나 더 추가하여 '진여.불.법.승'이 불교적 믿음의  대
    상이라고 논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 있어서의 믿음은, 인간은 누구나 절대적 진리
    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그 기본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에서는 인간이 신이 되려고 하거나 신과  동
    일한 위치에 있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교만이요,  근
    원적인 죄라고 하는데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오히려  그러지  않는
    것은 '교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은 법화경에서 "모든 부처는 중생에게  궁극
    적으로는 부처님과 똑같은 지견(知見)을  개시(開始)하고  오입(오
    입)케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는 것"이며 "지금가지 설해 온  여러가
    지 삼승의 교법은 모두가 그러한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미묘하게
    시설한 방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계신다.  그런뒤
    에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감히 뜻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교만이요'이요(권 1 방편품) 죄요 무지라고 규정하고  계신다.(무
    량수경)
 
      따라서 불교에서는 믿음은 항상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일으키는 '발심(發心)'과  함께 나타난다. 화엄경에 설해진 보살의
    길은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回向).십지(十支)'로  조직
    되어 있는데, 그 최초에 위치하고 있는 십주의 제일 첫 단계는  발
    심으로 되어 있으며 그러한 발심의 앞(제 12  현수품)에서  믿음이
    크게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뒤에 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십신(十信).십주(十住).십
    행(十行).십회향(十回向).십지(十支).등각(等覺).묘각(妙覺)' 이라
    는 '오십이위(五十二位)'설로 조직되고 있음을 물론이다.

      불교에 있어서의 믿음은 이와 같이 항상 발심을 수반하는데  이
    러한 발심은 부처님과 같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일으키
    는 것이므로 그것은 곧 종교적 실천의 행(行)으로  옮겨지지  않을
    수가 없다. 화엄경은 이런 뜻을 잘 표현하여 십주  다음에  십행을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적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한마디로  말해
    서 이상과 같은 불교적 '믿음'과 '발심'과 '행'을  하나로  연결한
    종교적 생활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3> : 진정한 불교적 신앙생활
     
      불교의 신앙생활은 이와 같이 그 개념이 명백한 것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것이 제대로 인식하고 제대로 행해지고 있을
    까? 
      오늘 우리들이 '불교, 어떻게 믿을 것인가'라는  주체를  내걸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우리의 실생활에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 주변에서 행해지는 중요한 불
    교적 신행(信行)을 예로 들어 그 문제를 살펴 보고자 한다.

      (1)
      우리사회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친근한 신앙형태로는 우선  불상
    앞에서 예불.공양.기도.발원하는 것을 들 수가 있다. 그런데  그런
    불상을 한낱 문화재나 예술품, 심지어는 우상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신앙심을 퇴전시키는 일이 있다. 이것은 참으로 경계해야 할  오해
    라고 보고싶다.

      순수한 신앙심에 불상이 단순한 조형물로 비치는  일이  있을까?
    영원히 살아계신 부처님의 이미지를 촉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
    다면 그것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요 부처님과 같은 것이니,  불교
    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부처님 앞에 나아가 예경하는 데에서부터 매
    일의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2)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괴로움에 부딪혔을 때  불교인은
    누구나 관세음 보살을 염한다. 그리고 사후에는 서방극락세계에 왕
    생할 것을 바래 부지런히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염불은 너무 타력신앙의 방향으로 흘러  기독교적
    인 구원의 관념과 거의 구별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위에서  살폈던
    불교적 믿음과 발심의 본질적 의미는 어떤 경우에도  망실되어서는
    않된다.

      따라서 관음 신앙을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히려  불교적
    믿음에 의지하라는 부처님의 뜻이라고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타 신앙 또한 정토왕생의 진정한 원인은 바로  발심이라는  것을
    항상 염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한국불교는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아 대.소승을 구별하여  소승
    을 부정하고, 조선조 500년의 억불정책 아래서 교학의 정채를 가져
    와, 선(선) 아니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믿음이 깊이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선교(禪敎)는 근본에 있어서 하나이며  대소승  또한
    일불승(일불승)을 임시방편으로 식별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럴진데 무엇보다도 먼저 불교인은 말씀을 근본으로 삼고, 최상
    의 깨달음을 얻고자 발심.수행하여 선재동자와  같은 보살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불교적 신앙생활이라고 본인은
    보고 싶다.

      부처님은 법화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너희들은 이제 모든 부처님의 진정한 뜻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
    니 의심을 하지말고 기뻐할지어다. 너희는 모두 부처가 될것이다."
                                           
                                        < 동대신문, 198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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